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우크라이나 관계 (문단 편집) === 근세 === 이후 16세기 말에는 우크라이나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던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루블린 조약을 맺으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거듭났고, 이 와중에 우크라이나 일대에 리투아니아인 귀족들이 폴란드인으로 대체되면서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지배 하에서 우크라이나 지역은 폴란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우크라이나 지주 계층 상당수는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폴란드인 귀족들과 통혼했으며,[*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어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생겼다. 우크라이나어가 러시아어 못지않게 폴란드어와도 흡사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폴란드 왕국 시절부터 유대인들이 우크라이나 전역에 정착하여 [[마름]] 및 소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다만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이 현지 주민들의 상공업자로서의 성장을 막기 위해 일부러 외부 민족의 유입을 촉진했다는 식의 설명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독일인과 유대인의 이주는 폴란드령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폴란드 본토,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및 [[에르데이 공국]], [[루스 차르국]], [[발트해]] 연안까지 동유럽 전역의 일반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동유럽 자체가 전반적으로 노동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독일인과 유대인은 현지 주민에 비해 경제적, 기술적, 문화적으로 앞섰으므로 현지 지배자들은 그들의 이주를 대개 환영했다([[독일 기사단]]처럼 아예 현지 지배자들도 압살할 정도의 독립세력으로 성장하지 않는다면). 독일과 가장 가까운 곳에 붙은 폴란드와 체코는 독일인과 유대인의 이민을 촉진하기 위해 각 도시마다 마그데부르크 법을 제정했다(즉 니네들 독일에서 살던대로 여기서도 살 수 있으니 우리나라로 와라 이런 뜻). 훨씬 후대의 [[예카테리나 2세]] 치하 러시아 제국도 종교의 자유와 병역 면제를 내걸고 독일인의 이민을 촉진했다.], 연방의 다른 농노들처럼 정교회를 믿는 농노들도 일주일에 8인일의 부역을[* 즉 가정에서 한 명은(대개 그 가정의 가장) 일주일 내내 영주에게 부역해야 했고, 다른 가족들도 일주일에 하루는 부역을 해야 했는 것이다.] 바치는 엄청난 착취를 당했다.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다른 서유럽 국가에 비해 취약한 경제 기반 때문에 농산물을 수출하고 그 대가로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사치품을 수입하였는데, 대지주의 영지가 밀집한 우크라이나 지방이 이런 착취의 주된 희생양이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아무리 반러, 친서방 감정이 심하더라도 폴란드를 경계하는데 이런 과거사가 있었다. 중동부 유럽 전반적으로 그랬듯이 폴란드인들은 슐라흐타(Szlachta)[*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주귀족 계층.]로서 현지 사회적, 정치적 엘리트로, 정교회권 우크라이나인들은 도시 외 인구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으로서 사회적, 경제적 분화와 이에 따른 갈등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루블린 조약]] 이후 27년 후인 1596년에 [[르비우|르부프]]의 정교회 시민들을 겨냥하여 [[동방 가톨릭 교회]]의 일파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으로 개종을 강요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새로 근세 루테니아어 종교 서적들이 번역, 출판되면서 폴란드어가 우크라이나어에 영향을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 [[크림 타타르]]의 노예 납치로 우크라이나 각지의 인구 부족 문제가 심각해지자 [[스테판 바토리]]와 [[지그문트 3세 바사|지그문트 3세]]는 폴란드 본토의 폴란드인 농민 상당수를 오늘날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갈리치아로 새로 이주하는 폴란드인 농민에 한해서 20년 동안 세금 감면, 봉건 요역 면제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고 이를 계기로 갈리치아 각지에 [[폴란드인]] 이민자들이 대거 정착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우크라이나 중부와 동부에는 슬라브 반농반목 집단인 [[코사크]]들이 자리를 잡고 크림 타타르족의 침략으로 황폐화되었던 흑토지대를 서서히 개간하며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한 때 방기되었던 우크라이나 동부 흑토 지대는 코사크들이 번창하면서 다시 인구가 증가하고 농토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은 크림 칸국의 위협이 약해질 때마다 코사크들이 다시금 개간한 우크라이나 동부 영토에도 공납과 요역을 부과하려 시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7세기 우크라이나 중부 지역에서 [[코사크]] 헤트만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정교회 차별 및 폴란드 대귀족들의 코사크 농노화 시도를 이유로 봉기를 일으켰다.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은 일전에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 나중에 [[제2차 빈 공방전]]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하고 [[빈(오스트리아)|빈]]을 구원한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외증조할아버지이다. 살아 생전 스테판 바토리와 지그문트 3세를 섬겼다.]가 코사크 반란군들을 평화조약을 맺는 척 기만하고 방심한 코사크들을 기습해서 격파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코사크들을 만만히 보고 평화조약을 임의로 파기했는데 이 과정에서 친폴란드파였던 흐멜니츠키를 적으로 돌렸다. 초반에 승승 장구하던 흐멜니츠키는 연방군의 반격으로 밀리자 [[루스 차르국]]에 개입을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대홍수(역사)|영토를 대거 상실]]하였으며 [[드니프로 강]]을 경계로 동쪽은 루스 차르국, 서쪽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땅으로 정해졌다. 처음 조약과 다르게 [[키이우|키예프]]는 러시아 제국 차지가 되었다. 우크라이나 일대의 폴란드인 지주들은 상당수가 코사크들에게 축출당했다. [[러시아 제국]] 내 다른 지역들 이를테면 [[라트비아/역사|라트비아]], [[에스토니아/역사|에스토니아]] 등지에서 독일인 지주들이 권리와 기득권을 거의 그대로 유지했던 것과 대조적이었다. 흐멜니츠키 봉기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자국 영내 정교회 신도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데 1676년 폴란드 의회는 정교회 신도들이 국외로 이주하거나 혹은 외국에서 이주해 오는 것, 총대주교들과 교섭하여 종교적 문제의 결정권을 넘기는 것 등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시 사형이나 재산 몰수형에 처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후 폴란드 귀족들은 정교회 성직자 상당수를 압박하고 포섭한 것을 기반으로 1708년을 전후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영내 정교회는 [[동방 가톨릭]]으로 완전히 통합시키고, 영내 남아있는 정교회 신도들을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도들로 명목상이나마 전부 동방 가톨릭 교파들로 개종시켰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에는 정교회 전례만 유지하고 교황 수위권을 인정하는 형태의 교파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이 뿌리박게 되었다. 18세기 [[표트르 대제]]의 개혁정치 및 대북방전쟁 승리로 루스 차르국은 [[러시아 제국]]으로 거듭나며 강대국이 된 반면,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결국 18세기 말에 [[폴란드 분할]]로 멸망하였다. 갈리치아와 [[자카르파탸]]를 제외한 우크라이나 대부분의 지역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갈리치아 일대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구성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으로 편성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